
2025년이 저물어간다. 한반도의 올 한 해는 언제나 그렇듯이 도전이 가득했다.
비상계엄이란 이름의 ‘셀프 쿠데타’를 성사시키려고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했던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파면되었으나 남북관계는 단절된 상태다.
나 또한 힘든 한 해를 보냈다.
탄핵 재판과 그에 이은 대선을 취재하는 한편, 원고를 계속 써내려 가며 9월 말에 겨우 일본에서 책을 펴냈다. 7년간 붙잡아 온 작업이었다. 그러다 번아웃이 찾아와 10월부터 3개월은 기사를 쓸 기운이 나지 않는 채 입만 움직여 겨우 한 해를 마감한 상태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올해를 되돌아보는 의미에서 꼭 써두고 싶은 내용이 있다. 장인어른 이상옥에 관한 이야기다.

●국가폭력
<분단 80년 -한국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의 한계>. 앞서 언급한 책의 제목이다.
1945년에 시작되어 여태 이어지는 한반도 분단 80년의 궤적을 따라가 그 현주소를 제시하는 동시에, 분단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정리했다.
‘남북관계’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일본 사회에서 한반도 이해에 도움이 되는 텍스트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한국생활 20여년의 경험을 담아 펴냈다.
책 속에는 과거, 계엄령 하에서 자행된 국가 폭력의 현장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1948년 10월 국방경비대 14연대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한 주민학살이 일어난 ‘여수 순천 10.19 사건’의 무대가 된 여수, 그리고 6.25전쟁 당시 수천 명에 달아는 대규모 주민학살 사건이 일어난 대전 산내 골령골 등을 다녔다.
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총을 든 시민들이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알아봤다. 폭력으로 얼룩진 한반도의 현대사를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상우의 죽음
이 과정에서 장인어른 일가의 이야기를 언급했다.
역시 6.25전쟁이 한창일 때 충북 음성에서 장인어른의 아버지, 이상우가 국군 6사단에 의해 총살됐던 것이다. 이상우는 당시 25세, 장인 이상옥이 불과 3세 때의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야기는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에 시작된다. 이상우는 교직을 맡고 있었고, 음성군은 1950년 7월 6일, 북한 인민군에 점령됐다.
그후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북한 식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피난을 안 가고 남아 있던 마을 주민들은 노역 등의 협조를 강요받았다. 거절할 경우에는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받는 구조 역시 흔한 점령 하의 모습이었다.
같은 해 9월 28일, 서울 수복을 전후하여 음성군에도 다시 한국 정부가 돌아왔다. 행정기능을 회복시킨 군과 경찰들은 북한 인민군이 인민위원회 사무실 등에 남기고 간 협력자 명단을 찾아낸다.
명단에 기재된 주민들은 북한에 동조하고 그 점령 및 지배에 가담한 ‘부역자’로 여겨졌다. 경찰은 명단에 있던 주민들의 자수를 촉구함으로써 비로소 ‘부역자수자 명단’이 만들어졌다.
이상우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그는 마을 노동당 인민학교의 부교장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죽음의 진상
비극은 이듬해 1951년 1월에 찾아왔다.
당시는 인내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1950년 10월에 38선을 넘어 한 때 압록강까지 도달하여 그 물을 물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 건넌 적도 있는 국군 6사단은 기나긴 퇴각길에 놓여 있었다.
10월 25일의 중국 인민의용군이 전쟁에 개입함에 따라 38선 이북 전선이 붕괴되어, 한겨울 속 후퇴를 거듭해 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23일 시민 대피 명령을 내린다. 이후 10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버리고 다시 남쪽으로 피신했다. ‘1.4 후퇴’로 불리는 사건이다.
1월 5일, 6사단 19연대는 음성군에서 군장을 풀게 된다. 당시 이미 북한 인민군은 불과 수십키로 떨어진 오산 이천 등까지 전진하여 6사단을 향한 포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긴장 속에서 지난 해에 만들어진 ‘부역 자수자 명단’을 입수한 19연대 헌병대는 현지 국민방위군에게 명단에 있는 모든 사람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결과 5일 오후부터 6일 오전에 걸쳐 동네 초등학교에 200여명이 갇히게 된다. 이상우도 이 안에 포함됐다.
안그래도 이곳 음성에서는 6.25전쟁 발발 직후이자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할 하루 전인 50년 7월 5일에 보도연맹원 15명 이상이 같은 6사단 헌병대 손으로 처형된 바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 현지 경찰관은 “왜 죄없는 사람들을 저렇게 모아두었느냐, 저렇게 모아놓으면 죽을 수도 있지 않느냐”며 항의하였으나, 국군 장교와 하사관들에게 의식을 잃도록 맞았다.
이렇게 모아진 ‘부역 자수자’는 과거의 ‘가담’ 정도에 따라 갑, 을, 병, 정으로 등급이 매겨졌다.
그리고 갑으로 분류된 전원과 을로 분류된 인사 중 일부까지 모두 59명이 다음 날인 6일 오후 총살된 것이었다. 헌병대가 인계하여 19연대 군인들이 총살하였다. 이때 ‘을’로 분류된 이상우도 목숨을 잃었다.

●장인어른의 열변
나는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아내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인어른 이상옥으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다. 예전에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었으나 장인어른은 늘 얼버무렸다. 드디어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아 카페에 따라갔다가 2시간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도 있다.
배경에는 그의 신중한 성격과 더불어 아버지 이상우가 ‘부역자’로 살해된 것을 가능한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남북 분단과 대립이 계속되는 한국에서 ‘부역자’는 곧 ‘빨갱이’로 간주돼 왔다.
연좌제 때문에 집안에 ‘부역자’로 분류된 인물이 있던 사람들은 불이익을 피하려고 그 사실을 애써 덮어왔던 것이다. 전국 경찰서마다 갖춰진 두툼한 ‘부역자 명단’이 신변 조사의 주요 참고자료로 활용돼 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장인어른의 입에서 직접 이상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올해 8월이 돼서다.
책 원고 마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후, 장인어른은 김포의 전망 좋은 카페에서 이상우의 죽음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당시 이미 폐암 4기를 앓고 있던 장인은어른은 7월부터 우리 집에 동거하고 있었다.
6.25전쟁의 전사(戦史)를 정리한 커다란 책을 펼쳐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켜가면서, 왜 아버지 이상우가 살해되었는지를 긴 시간동안 논리정연하고 뜨겁게 역설했다.
오랜 세월 동안 누구보다도 깊게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해 온 것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4기 암이라는 병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종일관 당찬 목소리를 유지해 온 장인어른은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이렇게 강조했다.
“분명 아버지는 북한에 협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살해당해야 할 정도의 일이었는가?”

●부당한 죽음
한국 정부도 이미 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정부 산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1월 진상규명 보고서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아래처럼 서술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자의적이든 강요에 의했든 인민위원회 또는 인민군에게 협조한 것으로 알려진 주민들이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점령하였을 당시 저항하거나 또는 협조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며, 설령 부역행위에 책임을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 잘못이 생명을 박탈해야 할 만큼 중대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권한도 없는 군인들이 정당한 법절차를 무시하고 현장에서 비전투 민간인들을 임의적으로 살해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장인어른은 또, 이상우 피살의 배경으로 국군·유엔군의 38선 월경과 북진을 꼽았다. 이것이 중국 인민의용군의 개입을 초래하고, 국군·유엔군이 퇴각을 거듭했던 상황이 이상우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해석이었다.
며칠 뒤 이 시각의 타당성에 대해 여쭤보려고 6.25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연구의 대가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를 찾아갔다. 1기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상임위원을 맡았던 전문가다.
김동춘 교수는 “월경(북진)은 학살의 피해를 두 배로 키웠다”고 수긍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에서 멈췄다면 남북 분단이 지금처럼 견고하지 않았을 수 있다. 남북 모두 희생이 두 배로 늘어남에 따라 적개심도 두 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다음날 이 견해를 전하자 장인어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어른은 앞서 인용한 진실규명 보고서를 토대로 다른 피해자와 더불어 손해배상 재판을 제기해 2013년 승소한 바 있다. 나는 8월에 그 자료 일체를 건네 받고, 책에 그 경위의 일부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장인의 진심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 기쁨 뒤에
9월 말에 일본에서 책이 출간되었고 10월이 되자 몇 가지 긍정적인 반응이 내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장인어른의 사연은 분단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로 끌어들이는 맥락에서 일본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 같았다.
장인어른 역시 인쇄된 지 얼마 안 된 책을 들고 내가 없는 곳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죽은 이상우가 살아났네. 네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다”
하지만 병마는 장인어른의 몸을 인정 사정없이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중순이 되자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의 월간지 「세계(世界)」편집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웃의 저널리즘>이라는 언론인의 릴레이 연재에 대한 기고 요청이었다.
나는 <전후(戦後), 해방(解放), 그리고 분단(分断) 80년>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보냈다.
2025년은 일본에서는 전후(패전) 80년, 한국에서는 식민지 해방 80년이지만, 지금도 한반도와 동아시아 성격을 규정하는 ‘분단 80년’이야말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대상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이때, 병석에 누워 있던 장인어른에게 “올 해 해방 80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물어보았다. 질문을 자세히 적어 건넨 다음 날, 성실한 장인어른은 빽빽하게 글씨를 채운 3장의 메모지를 줬다.

거기에는 예상 못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당 부분을 인용해본다.
“해방 80년,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 국가가, 사회가 인권을 좀 회복해 주었다 하여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그 직계가족의 피맺힌 삶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희생자는 희생자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광복 80년이니 광복 90년이니 하는 것은 그 당시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은 자나 그 후손들이 세상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붙이는 장식품일 뿐이다.
광복 100년 정도 되면 6.25전쟁 당시 희생자들과 그 직계 후손들은 전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살아남은 자들과 그 직계 후손이 그럴싸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왜, 세상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큰 충격이었다. 내가 여태 읽은 수많은 문장 중에서 이렇게 슬픈 구절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장인어른의 거짓없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나는 앞서 발간한 책에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 바가 있었다. 재일교포인 내게도 일부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절필(絶筆)이라 부를 만한 위의 내용은 “치유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경구(警句)만 같았다.
●이상옥이 남긴 것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25일, 장인어른 이상옥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잡지 <세계> 편집부에는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우의 사진을 실어달라고 부탁했고 편집부에서는 이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호스피스에서 최후의 시간을 보내는 장인어른에게 잡지를 보였드렸더니,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눈을 뜨며 인지하는 것만 같았다.
안타깝게도 “평생 동안 아버지를 잃은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8월부터 이어진 일련의 소통을 통해, 국가의 불합리한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새기는지 그 일단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늘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고백에서 그 상상이 얼마나 빈곤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자연스레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또한 세계 도처에서 현재도 반복되는 전쟁과 국가 폭력 속에서 상처입은 사람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한 재일교포 어른이, 장인어른의 사연을 담은 내 책을 가리키며 “일부 장인의 유서 역할도 하게 한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아마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않은 채 세상을 떠난 장인어른 이상옥. 그 고백을 접한 것이야말로 전후·해방·분단 80년인 올해, 내가 얻은 둘도 없는 배움이었다. 이상옥은 음성의 선산에서 아버지 이상우와 어머니 김홍순과 함께 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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